제86주년 순국선열의 날 계기 독립유공자 95명 포상
제86회 순국선열의 날 계기 독립유공자 95명 포상
-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신홍윤 선생 등 독립유공자 95명 포상
- 95명(건국훈장 애국장 6, 애족장 25, 건국포장 6, 대통령표창 58)
- 1949년 최초 포상 이후 총 1만 8,664명 포상... 건국훈장 1만 1,920명, 건국포장 1,568명, 대통령표창 5,176명 국가보훈부(장관 권오을)는 제86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1919년 4월, 황해도 해주군 취야장터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신홍윤 선생(애국장)과 미국 전략첩보국(OSS)의 냅코작전에 참여하여 활동한 최창수 선생(애족장), 여성으로서 중국 길림에서 ‘대한독립만세’ 혈서를 작성 하여 독립의식을 고취한 박혜숙 선생(건국포장) 등 95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밝혔다. 신홍윤 선생은 1919년 4월 3일, 황해도 해주군 취야장터 만세시위에 선두로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었다. 특히, 선생은 재판과정에서 ‘조선 민족으로서 독립만세를 외친 것은 죄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며 재판 투쟁을 이어갔으며, 이후 징역 4년의 옥고를 치렀다. 선생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서장관 선생도 1991년 포상(건국훈장 애국장)되었다. 평안남도 평양 출신인 최창수 선생은 미국에 유학하여 대한인국민회 뉴욕 지방회에서 활동하고, 1943년 미군에 입대하여 인도·미얀마지구에서 특수공작 작전을 수행하다 미국 전략첩보국(OSS)의 냅코작전에 참여하였다. 또한, 일본에 의해 노무자로 징용된 후, 사이판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냅코 작전에 선발되어 활동했던 김필영 선생도 이번에 독립유공자로 포상(건국포장)한다. 박혜숙 선생은 1913년 8월 중국 길림에서 개최된 제3회 경술국치결의 대회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만세’ 혈서를 작성하며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선생의 이러한 행동은 그날 참석한 청중들은 물론 미주지역 한인신문「국민보」에 보도되면서 미주지역 동포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박혜숙 선생 이외에도 여성으로서 1911년 일가족과 중국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한 박순부·이해동 선생(애족장)과 1918년 부친을 따라 중국 상해로 망명, 1945년 8월까지 중국 중경 등지에서 배우자 박시창 선생 등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최윤신 선생(애족장)도 이번에 독립유공자로 포상된다. 여기에 1932년부터 극단 ‘메가폰’과 ‘신건설’을 조직하여 서울 마포 도화 극장 등에서 일본의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연극을 하고, 연극잡지를 발간하는 등 예술인으로서 일반 대중에게 문예활동을 통해 독립정신을 일깨우는데 노력한 이상춘 선생도 포상(건국훈장 애족장)된다. 이번 독립유공자 포상은 각종 재판 판결문과 수형 기록 등 국가보훈부의 대대적인 자료 발굴과 수집, 분석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올해 제86회 순국선열의 날 계기 95명의 포상자 중 건국훈장은 31명(애국장 6, 애족장 25), 건국포장은 6명, 대통령표창은 58명이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번 순국선열의 날까지 총 1만 8,664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었으며, 이 가운데 건국훈장 1만 1,920명, 건국포장 1,568명, 대통령표창 5,176명이다.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은 “제86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조국 독립을 위해 희생·헌신한 분들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할 수 있게 되어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면서 “국가보훈부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신을 바치셨던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억·계승하기 위해 한 분의 독립운동가라도 더 발굴하고 포상하여 모두를 위한 특별한 희생을 기억하고 예우할 수 있도록 노력 하겠다”라고 밝혔다. 제86회 순국선열의 날 계기로 포상될 주요 인물의 독립운동 공적은 다음과 같다. ❖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재판투쟁을 이어간 신홍윤 선생(애국장) 신홍윤 선생은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선생은 1919년 4월 3일 황해도 해주군 취야 장터의 독립만세시위에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선생은 해주지방법원과 평양 복심법원, 고등법원 총 3번에 걸쳐 재판을 받았고, 최종 징역 4년을 언도받았다. 그 과정에서 선생은 재판장에서 조선민족으로 조선 독립만세를 외친 것은 잘못이 아니 라고 주장하며 재판 투쟁을 이어갔다. 참고로 황해도 해주군 취야장터의 독립만세 시위에는 약 1,000여명의 군중이 참여 하였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선생은 그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만세를 외쳤고 이후 재판 투쟁까지 벌이며 체포된 뒤에도 끝까지 일본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취야장터에서 벌어진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던 많은 애국지사들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 중 선생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고 재판 투쟁을 이어가다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치른 서장관 선생은 1991년 애국장에 서훈되었으며, 재판 투쟁의 내용은 확인되지 않으나 선생과 같은 징역 4년을 받은 윤상순 선생은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었다. 독립유공자 포상 공적심사위원회에서는 신홍윤 선생이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이후 재판 투쟁 및 징역 4년의 옥고 등 고초를 겪은 점을 인정하여 이번 순국선열의 날 계기 건국훈장 애국장에 서훈하였다. ❖ 미국 유학생으로 미군에 입대하여 대일전에 참전한 최창수 선생(애족장) 징용으로 외국에서 강제노동을 하다 대일전에 참전한 김필영 선생(건국포장) 최창수 선생은 평안남도 평양 출신이다. 선생은 미국으로 유학한 뒤, 뉴욕에서 대한인 국민회 뉴욕지방회 서기로 8년간 활동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조국 독립을 위해 1943년 미군에 입대하여 인도·미얀마 지구에서 특수 공작작전을 수행하였다. 당시 재미 한인들은 미국과 일본의 전쟁을 예견하였고,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조국 독립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선생 역시 위와 같은 맥락에서 미군에 지원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선생은 1945년 미국 OSS의 냅코 작전에 참여하였다. 참고로 냅코작전은 미국 OSS가 한반도에 공작원을 침투시켜 한반도 내의 정보수집 등을 위해 재미한인 중 민간인・ 군인・미국 내 한인 포로 등을 활용하여 추진한 한반도 침투작전이었다. 한편, 최창수 선생과 더불어 냅코 작전에 참여하였던 김필영 선생도 건국포장에 서훈 되었다. 김필영 선생의 경우 일본에 의해 강제노역을 하다 미군 포로가 되었고 이후 냅코 작전에 선발되어 조국 독립을 위해 군사훈련을 받고 국내 침투 계획에 참여하였다. 최창수·김필영 선생의 포상에 따라 냅코 작전 관련자로 현재 유일한 선생(1995년 독립장) 등 17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으며, 두 선생은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발굴 업무에 따라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진행하여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파견 협상을 이끌고 임정에서 활동한 최성오 선생(애족장) 최성오 선생은 평안북도 삭주 출신이다. 선생은 1943년 2월 조선민족혁명당 소속으로 인도에 파견되어 영국군과 대일선전을 진행하고, 선전부대 파견에 관한 협상을 진행 하였다. 선생이 협상을 진행한 선전부대는 1943년 8월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였다. 인면전구공작대는 영국군의 요청으로 인도-버마 전선에 파견되어 대일선전 등의 활동을 이어갔으며, 제2차 세계대전기 한국광복군이 연합국과 합작하여 대일항전을 펼진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인면전구공작대 파견에 앞서 선생은 영국 측과 제반 사항을 논의 하면서 실제 부대가 파견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이후 선생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던 조선민족혁명당의 만현특구 대표와 중앙집행위원, 1945년 대한민국임시 의정원 비서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선생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는 국가보훈부의 발굴 업무에 따라 진행되었으며, 독립유공자 포상 공적심사위원회에서는 선생의 활동을 인정하여 이번 순국선열의 날 계기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하였다. 참고로 인면전구공작대와 관련하여 문응국, 김상준, 최봉진 선생은 1990년, 박영진 선생은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서훈되었으며, 나동규 선생과 안원생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었다. 또한 외국인으로서 롤랜드 클린턴 베이컨과 프랭크 윌리암스 선생은 인면전구공작대 지원 등의 공적으로 각각 애족장(2020년)과 건국포장(2023년)에 서훈되었다. ❖ 예술인으로서 조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상춘 선생(애족장) 이상춘 선생은 대구 출신이다. 선생은 1932년 서울에서 조국 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위해 잡지 「연극운동」을 발간하고, 극단 ‘메가폰’ 및 ‘신건설’을 조직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한 1935년 극단 ‘신건설’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전 활동을 이어가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고 다시 한번 옥고를 치렀는데, 선생의 총 옥고기간은 2년 1개월 이상으로 판단된다. 선생은 당시 “신진무대장치가”로서도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안타깝게도 만 27살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선생의 활동은 연극을 통해 일반 민중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실상을 알리고 조국 독립의 필요성을 각인시켰다는 의의가 있다. 그리고 1930년대 독서회와 같은 비밀결사 조직들이 문화예술부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생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는 일반인의 신청과 국가보훈부의 자료조사를 통해 진행 되었으며, 독립유공자 포상 공적심사위원회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하였다. ❖ 혈서로서 조국 독립을 염원한 박혜숙 선생(건국포장)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한 박순부·이해동·최윤신 선생(애족장) 박혜숙 선생은 평안남도 안주 출생이다. 박혜숙 선생이 중국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시점은 확인되지 않으나, 1913년 중국 길림에서 개최된 제3회 경술국치 결의대회에서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만세’ 혈서를 작성하였다. 박혜숙 선생의 활동은 여성으로서 1910년대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던 독특한 사례로, 미주지역까지 활동상이 전달되어 재미 한인사회에 큰 귀감이 되었다. 박순부·이해동 선생은 김동삼 선생(1962년 대통령장)의 일가이다. 두 분은 김동삼 선생의 배우자와 며느리로서 1911년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다. 특히 김동삼 선생은 ‘만주의 호랑이’로 불리며 신흥무관학교와 서로군정서를 이끌었고 국민대표대회 의장으로도 활동하였다. 두 분은 김동삼 선생의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으며, 두 분의 헌신이 있었기에 김동삼 선생의 집은 독립군의 연락처이자 거점으로 활용되며 독립운동을 지탱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던 것이었다. 최윤신 선생은 황해도 신천 출신이다. 선생은 1918년 부친을 따라 중국 상해로 망명 하였고, 1936년 박시창 선생(1963년 독립장)과 결혼하였다. 박시창 선생은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1962 대통령장)의 아들이자, 본인 역시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 활동한 독립유공자이다. 선생은 박시창 선생과 결혼한 후 망명생활을 이어가며, 중국 중경 등지에서 박시창 선생을 내조하였고, 임시정부의 활동에도 힘을 보태는 등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독립유공자 포상 공적심사위원회에서는 여성으로서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던 박혜숙 선생은 건국포장,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던 박순부·이해동·최윤신 선생은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서훈하였다. 붙임 1. 정부 포상자 명단(95명)
2. 정부 포상자 운동계열・출신지역별 현황
3. 주요 포상 대상 세부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