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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주년 광복절 계기 독립유공자 311명 포상

· 2025.08.13 13:48 ·수정 2025.08.13 13:49 · 조회 3

- 독립유공자 311명(건국훈장 독립장 2명, 애국장 13명, 애족장 56명, 건국포장 22명, 대통령표창 218명) 포상

- 충남 청양군 정산면 출신 ‘독립만세시위 참여’ 정연봉 선생 등 62명 포상

- 1949년 최초 포상 이후 총 1만 8,569명 포상... 건국훈장 1만 1,889명, 건국포장 1,562명, 대통령표창 5,118명 국가보훈부(장관 권오을)는 제80주년 광복절을 맞아 1932년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피신을 도운 미국인 제랄딘 피치(Geraldine T. Fitch, 독립장) 여사와 국내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이끌고 태평양전쟁 기간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활약한 김술근 선생(애족장) 등 311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밝혔다. 미국인 제랄딘 피치(Geraldine T. Fitch) 여사는 1932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에 체포될 위기에 있던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의 피신을 도왔다. 이후에도 피치 여사는 1940년대 미국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지지하는 활동을 이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피치 여사와 함께 임시정부 요인의 피신을 도운 남편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도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서훈되었다.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인 김술근 선생은 1919년,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파고다 공원의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뒤 공원 밖으로 진출해 독립만세 시위를 이끌다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하여 1929년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보스턴 지방회 회장, 1930년 뉴욕 학생대회 토의부장 등을 역임하며 재미 한인의 단결과 독립운동 후원에 앞장섰으며,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독립운동 목적으로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하사로 활약하였다. 그 밖에도 1920년대 초 중국 만주에서 광정단과 북로군정서에 소속되어 일본 경찰 등과 전투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 등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받은 김창준 선생(독립장)을 비롯하여, 쿠바지역에서 독립운동 지원 등의 활동을 했던 안순필 일가 6명(대통령표창), 1919년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된 정연봉 선생 등 정산면 출신 62명* , 1940년 조선총독부 청사 승강기 운전수로 동지들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 하다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최종유 선생(애족장)도 독립유공자로 포상 된다.

* 정연봉・이봉식・최상등 선생(애족장), 최인섭 선생 등 59명(대통령표창) 이번 독립유공자 포상은 각종 재판 판결문과 수형 기록 등 국가보훈부의 대대적인 자료 발굴과 수집, 분석을 중심으로 진행됐으며, 특히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3.1운동 참여자 62명은「범죄인명부」등 지속적인 자료 발굴・수집 등의 노력을 통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올해 제80주년 광복절 계기 311명의 포상자 중 건국훈장은 71명(독립장 2, 애국장 13, 애족장 56), 건국포장은 22명, 대통령표창은 218명이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번 광복절까지 총 1만 8,569명이 독립 유공자로 포상되었으며, 이 가운데 건국훈장 1만 1,889명, 건국포장 1,562명, 대통령표창 5,118명이다.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은 “제80주년 광복절 맞아 조국독립을 위해 희생· 헌신한 분들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할 수 있게 되어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면서 “국가보훈부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신을 바치셨던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기억·계승하기 위해 한 분의 독립운동가라도 더 발굴하고 포상하여 모두를 위한 특별한 희생을 기억하고 예우할 수 있도록 노록하겠다”라고 밝혔다. 제80주년 광복절 계기를 맞아 포상될 주요 인물의 독립운동 공적은 다음과 같다. ❖ 미국인으로서 임시정부 요인의 피신을 도운 제랄딘 피치 여사(독립장) 제랄딘 피치(Geraldine T. Fitch) 여사는 미국 미시간주 출생으로 앨비언 대학을 졸업 하고 감리교 선교사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그녀는 남편인 애쉬모어 피치와 1924년 결혼하였고, 이후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거가 일어났다. 윤봉길 의거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안창호 선생 등 여러 인사가 일제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당시 피치 부부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자신들의 집에 피신시켜, 일제의 감시망을 피 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특히 피치 여사는 직접 차를 운전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이 무사히 상해를 빠져나가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훗날 김구 선생은 피치 부부의 도움을 받은 사실을 『백범일지』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피치 부인은 이후에도 미국으로 돌아가 1940년대 한국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고 한미협회의 뉴욕지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남편인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은 1968년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신을 도운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에 서훈되었다. 공적심사위원회에서는 피치 부인의 공적도 남편의 공적과 다르지 않다고 판단하여 독립장에 서훈하였다. ❖ 국내에서 3.1운동을 이끌고 미국에서 자원입대하여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김술근 선생(애족장) 김술근 선생은 평남 대동 출신으로 1919년 3월 서울에서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파고다 공원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하고 시내를 돌며 만세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선생은 미국으로 건너가 1929년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보스턴지방회 회장, 등으로 재미 한인의 단결과 독립운동 지원에 앞장섰다. 또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 9월 독립운동 목적으로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하사로 활약했다.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제1회 졸업생으로, 미국 유학 후 명문대인 노스웨스턴대와 하버드대에서 수학한 한국 근대 제1세대 과학자였다. 연희전문 재학 시 3월 1일 만세시위의 중추로 활동했는가 하면, 힘든 미국 유학 생활 속에서도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유학생들의 단합과 독립운동 후원에 앞장서는 등 1919년부터 광복 때까지 국내와 미국에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평생 독신을 고집했고, 남은 재산 5,000달러도 ‘제2의 고향’인 보스톤 한인 교회에 기부했다. 선생은 독립운동 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채 독립운동에 나서 발굴 과정이 쉽지 않았다. 3.1운 동은 판결문을 통해, 미국에서의 학생운동과 태평양전쟁 참전 사실은 미국 국립문서보관청 (NARA)에 소장된 문서의 수집이 포상에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공적심사위원회는 국내와 미국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하였다. ❖ 1920년대 초반 중국 만주와 국내를 넘나들며 무장투쟁에 나선 김창준 선생(독립장) 김창준 선생은 충북 제천 출신으로 1922년경 중국 장백현에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광정단에 가입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 선생은 1922년 9월 동지들과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작전 수행을 위해 국내 일본 관헌의 무기를 강탈할 것을 계획하여 압록강을 건너 9월 25일 함남 삼수군 호인면의 영성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후에도 선생은 북로군정서에 투신하여 모연대장 이홍래의 명령에 따라 중국 왕청현 세린하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받았다. 선생은 옥에서 6년 10개월여를 보냈다. 고통스러운 옥고를 치르던 중 선생은 몸이 쇠약해졌으며, 결국 폐결핵으로 인해 형집행정지로 가출옥하였다. 선생의 병에 대해 일제는 “옥에서 폐결핵으로 생명을 보존할 수 없을 우려가 있다”고 기록하였다. 선생의 활동은 1920년대 중국 만주와 국내를 넘나들며 조국 독립을 위한 군사적 활 동을 진행한 대표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도 이러한 군사적 행동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시하였다.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에서는 선생이 비록 6년 10개월여의 옥고를 치렀으나, 폐결핵으로 인해 생명이 위태로운 채로 출옥한 후 바로 옥고로 인한 여독으로 순국하였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건국훈장 독립장에 서훈하였다. 선생의 독립장 서훈은 2020년 이후 5년만이다. ❖ 이역만리 쿠바지역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안순필 일가 6명(대통령표창) 쿠바지역 안순필 일가 6명(김원경・안군명・안정희・안홍희・안재명・안수명 선생)은 고난한 생활 속에서도 조국 독립의 희망을 놓치않고 해방 때까지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김원경 여사(안순필 부인) 1938년부터 대한여자애국단 아바나지부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안군명・안재명・안수명 선생(아들)은 대한인국민회 아바나지방회에서 활동하며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안정희・안홍희 선생(딸)은 김원경 여사와 같이 대한여자애국단 아바나지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한국독립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각지에서도 진행되었으며, 그 중 쿠바지역은 미국으로 이주하였던 한인들이 멕시코를 거쳐 정착하며 한인사회를 형성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생활은 매우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제2차 세계대전기 조국 독립을 위해 많은 한인들이 대한인국민회와 대한여자애국단, 재큐한족단 등에 소속되어 독립운동을 지원 하였다. 특히 안순필 일가의 독립운동은 이러한 모습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안순필 일가의 독립유공자 포상은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발굴 업무에 따라 진행 되었다. 참고로 안순필 선생은 2023년 건국포장, 딸 안옥희 선생은 2021년 대통령표창에 서훈되어 총 8명의 일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 충남 청양군 정산면 정산시장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던 정연봉 등 62명 정연봉・이봉식・최상등 선생(애족장), 그 외 최인섭 선생 등 59명(대통령표창) 1919년 4월 5일 충남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정산시장 독립만세운동에는 약 700여명의 인원이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며, 그 중 체포되어 태형을 받은 인물은 약 150여명으로 추산되며, 금번 광복절에는 62명이 독립유공자로 포상된다. 정연봉 선생과 이봉식 선생은 독립만세운동 현장에서 체포되어 태 90도, 최상등 선생은 태 70도의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세 분은 태형이 집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형의 여독으로 순국하였다.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에서는 세 분의 독립만세 운동 참여와 순국사실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하였다. 그 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태형을 받은 최인섭 선생 등 59명은 대통령표창에 추서된다. 충남 청양군 정산면의 만세시위는 매우 치열하게 진행된 충청지역의 대표적인 독립 만세운동으로 대상자들은 모두 적극적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특히, 정산면의 사례를 통해 조선총독부가 폭력적인 형벌인 태형을 식민지 한국인에게 광범위하게 부과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충남 청양군 정산면 지역의 포상은 국가보훈부의 『범죄인명부』 발굴・수집을 통해 진행 되었으며, 이후에도 해당 자료를 면밀히 분석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한 분들을 찾고자 한다. ❖ 미주지역에서 부부로서 독립운동을 지원한 황사선・김옥석 선생(애족장) 황사선 선생은 평북 의주 출신으로 1913년부터 해방 때까지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표원과 부회장,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김옥석 선생은 평북 선천 출신으로 1919년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 중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징역 4월을 받았다. 이후 선생은 미국으로 이주하였으며, 194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여자애국단 샌프란시스코 지부 단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황사선 선생은 목사로서 재미한인사회의 결속을 도모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김옥석 선생은 국내에서 독립만세에 참여하다 옥고를 치른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재미한인 여성 사회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두 분은 부부로서 재미한인사회를 이끌며 조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점이 주목된다. 황사선 선생과 김옥석 선생은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발굴 업무에 따라 공적심사에 부의되었으며, 공적심사위원회에서는 두 분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하였다. ❖ 일제의 조선 통치 심장 조선총독부에서 조국의 독립을 꿈꾼 최종유 선생(애족장) 최종유 선생은 경기도 장단(현재 파주시) 출신이다. 선생은 1940년 일제의 조선 통치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에서 승강기 운전수로 근무하던 중 동료 최명근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정무총감 앞으로 발송된 기밀문서를 반출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았다.(실옥고기간 1년 2개월 10일) 만 17세의 나이에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우고 더 나아가 동지들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였던 선생의 활동은 독립운동 역사에서도 매우 독특한 사례이다. 일본도 조선 통치의 최고 관청에서 발생한 독립운동에 대해 매우 엄중하게 반응하였던 것이 확인된다. 이를 통해 일본의 충격을 알 수 있다.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고 실행에 옮겼던 최명근 선생은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었다. 선생은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발굴 업무에 따라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진행하였으며, 위의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었다. ❖ 징용으로 외국에서 강제노동을 하다 대일전에 참전한 김현일・이종흥 선생(건국포장) 김현일 선생은 황해도 신계군, 이종흥 선생은 황해도 서흥군 출신이다. 두 선생은 일제 말기 징용으로 사이판에 와서 강제 노동에 종사하던 중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후 미국 OSS가 추진한 한반도 침투작전인 냅코작전에 참여하여 훈련을 받았다. 냅코작전은 미국 OSS가 한반도에 공작원을 침투시켜 한반도 내의 정보수집 등을 위 해 재미한인 중 민간인・군인・미국 내 한인포로 등을 활용하여 추진한 한반도 침투작 전이었다. 국내에서 징용으로 사이판에서 강제 노동에 종사하고, 미군 포로가 되었으나 조국 독 립을 위한 군사훈련을 받은 두 선생의 인생역정은 독립운동의 매우 특별한 사례이자, 고된 환경 속에서도 조국 독립의 희망을 놓치 않았던 한국인의 정신을 대변한다. 냅코 작전 관련자로 현재 유일한 선생(95 독립장) 등 13명이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 으며, 두 선생은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발굴 업무에 따라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진행하였으며 건국포장에 서훈하였다. ❖ 어린 소년이었으나,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은 누구보다 높았던 김동하 선생(대통령표창) 김동하 선생은 경남 울산 출신으로 1928년 만 15세의 나이로 언양공립보통학교 재학 중 언양소년회 가입하여 회원으로 ‘일본인을 쳐부수고 조선을 회복하자’는 글과 태극기를 그린 문서를 경찰서 게시판에 붙이다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았다. 김동하 선생은 어린 나이임에도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동지들의 주장에 함께하여,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문건과 태극기를 일본 통치의 최전선 기관인 경찰서에 게시하면서 독립의 의지를 표현하였다. 당시 어린 소년의 독립운동에 대해 지역 사회에서는 큰 관심을 보였고, 선생의 재판 에는 방청석이 만원이 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선생과 함께 활동하다 징역 2년을 받은 이동개 선생은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 되었다. 선생은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발굴 업무에 따라 공적심사를 진행하였으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붙임 1. 정부 포상자 명단(311명)

2. 정부 포상자 운동계열・출신지역별 현황

3. 주요 포상 대상 세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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